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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사회 이슈 2019. 9. 25. 15:50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용의자를 잡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범인 유력후보로 올라 유력한 용의자로써
수사까지 받았다는 이춘재는 왜 잡히지 못한 것이었을까요?
알아보겠습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경찰이 30여 년 만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특정한 이춘재는
화성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유력한 범인으로 꼽혔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과학수사 기술의 한계에 부딪혀 A 씨를 용의자로 결론 내리는 데 실패했고
결국 이 사건은 그동안 우리나라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장기미제사건으로 남아왔습니다.
25일 경찰 등에 따르면 당시 경찰이 이춘재를 화성사건의 용의자로
추정한 시기는 6차 사건이 발생한 이후입니다.
6차 사건은 1987년 5월 9일 오후 3시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의 한 야산에서
주부 박모(당시 29세) 씨가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 발생 이후 경찰은 탐문, 행적조사 등을 통해 A 씨가 용의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를 불러 조사했습니다.
경찰은 A 씨에 대해 입수한 주민 진술 등 첩보를 통해 그가 의심된다고 보고
지휘부에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이 있습니다"고 보고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이춘재는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습니다.
당시 과학수사 기술로는 6차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체액 등 증거물이
이춘재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었던데다
6차 이전 사건에서 확보한 증거물을 통해 추정한 용의자의
혈액형과 이춘재의 혈액형이 달랐고
족적(발자국) 또한 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확보한 증거물에서 DNA를 검출해 분석하는 기술이 도입되기 전이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이 기술을 수사에 처음 도입한 시기는 1991년 8월로
마지막 10차 사건이 발생한 지 4개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전까지는 혈흔을 분석해 혈액형을 파악하는 정도의 기술을 수사에 활용했는데
결정적으로 이를 통해 당시 경찰이 추정한 용의자의 혈액형은 B형이었지만
이춘재는 O형이었습니다.
다만, 경찰이 이춘재를 강도 높게 조사한 이유에서인지
이춘재의 거칠 것 없던 범죄행각은 이후 한동안 잦아들었습니다.
1차 사건부터 6차 사건까지는 짧게는 이틀
길게는 4개월의 짧은 시간을 두고 범행이 이뤄졌었는데
7차 사건은 6차 사건 이후 1년 4개월 만에 발생했습니다.
이춘재가 자신을 향한 수사망이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범행에 나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경찰은 이후에도 8차 사건과 10차 사건이 일어난 뒤 2차례
더 이춘재를 불러 조사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고
이춘재는 화성사건이 아닌 10차 사건 이후 2년 9개월이 지난 1994년 1월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검거됐습니다.
이춘재가 이번에 용의자로 특정된 것처럼 당시에도
유력한 용의자였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하승균(73)
전 총경 등 전·현직 경찰관들은 대부분 이춘재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수사대상자가 워낙 많았고 이 가운데 용의자로 의심받은 사람도
A 씨 한 사람이 아니어서 이를 일일이 기억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언론에 알려진 수사에 참여했던 경찰관 외에 이 씨를 기억하거나
이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한 사람들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부족한 과학수사 기술에도 A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본 것은 성과이지만
동시에 거기서 그칠 수밖에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경찰 입장에서 아쉽고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져 정당한 죗값을 치뤘으면 좋겠습니다.
글은 여기까지 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더 알찬 좋은정보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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